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웨덴/역사/바사 왕조 (문단 편집) ==== 덴마크와의 북방 7년 전쟁과 에리크 14세의 폐위 ==== AD 1561년 [[리보니아 기사단]]령이었던 [[리보니아]]가 모스크바 대공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기사단을 해체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복속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에 외젤-비크를 차지하고 있던 덴마크에서 리보니아 북부도 노리기 시작했으나 에리크 14세가 인접한 핀란드를 통해 먼저 병력을 투입하여 리보니아 북부를 차지한 후 '[[에스토니아 공국]]'으로 재편했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가 AD 1563년 5월에 벌어진 소규모 국지전인 보른홀름 해전을 이유로 8월 13일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해오면서 '북방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바다에서는 스웨덴이 유리하고 육지에서는 덴마크가 유리하게 흘러가며 지지부진해졌다. 한편 에리크 14세는 즉위 초부터 정신적으로 불안했는데 점차 그 상태가 심각해졌다. 에리크 14세는 자신의 전제군주제와 덴마크 전쟁으로 때문에 내부 불만이 고조되자 반란이 일어날까봐 전전긍긍하였고 급기야는 AD 1567년 스투레 가문의 스반테 스투레와 그의 아들인 닐스, 에리크를 반역혐의로 체포하였다. 스투레 가문은 칼마르 동맹 시절 섭정을 잇달아 배출한 만큼 스웨덴 귀족들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했는데 실제로 구스타브 1세 바사 시절에도 스투레 가문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에리크 14세는 재판 도중에 정신 착란을 일으켜 그대로 처형해 버렸다. 비록 제정신이 돌아온 에리크 14세가 후회하며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했지만 스웨덴 귀족들은 더이상 에리크 14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AD 1568년에도 에리크 14세의 기행은 계속되어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민 출신의 [[카린 몬스도테르]]와 결혼하였다. 이렇게 에리크 14세가 명망있는 스투레 가문은 박해하고 미천한 신분의 왕비를 맞아들인 것에 대하여 혈통을 중시하는 스웨덴 귀족들은 분노했고 전년도에 석방되었던 에리크 14세의 동생인 요한이 다른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동참했다. 결국 에리크 14세는 폐위된 채 요한이 스웨덴 왕 요한 3세로 즉위했고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 에리크 14세는 AD 1577년 사망하고 같은 해 에리크 14세의 후손들의 왕위계승권에 대한 박탈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